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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전범이 아니다

나는 전범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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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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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문창재
쪽수
248
ISBN-13
978-89-429-0855-4
ISBN-10
89-429-08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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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범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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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주의에 희생된 한국인 전범들
나는 전범이 아니다

◑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에 한국인 전범들의 절규!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 때문에 한국인 148명이 전범으로 처벌받았고, 그 가운데 23명이 사형을 당한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우리 현대사에 결락된 이 얘기는 엄연한 사실로서, 그 피해자들은 아직 일본 정부

를 상대로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일진사가 발행한 『나는 전범이 아니다』는 태평양 전쟁 재일 한국인

전범 출신자 모임인 동진회(同進會) 회원들이 50년이 넘도록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보상 투쟁을 기자의

감각으로 고발한 논픽션이다. 1990년대 도쿄 특파원 출신인 저자(문창재.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는 일본 근무

중 동진회의 법정 투쟁 취재 보도를 계기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후 10수년 동안 취재와 관찰을 계속

하면서 소송 기록과 관련 자료들을 섭렵해 이 책을 저술하였다.

일본은 전쟁 중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등 수십만 명의 연합국 포로가 붙잡히자 1942년

8월에 식민지인 조선과 대만 청년들을 감시원으로 징발해 동남아시아 각지의 전장에 마련한 포로 수용소에 보냈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한 태국 지역에서는 콰이강 철도공사에 수많은 연합국 포로가 강제 노동에 동원되어

 "침목 하나에 사람 하나가 죽었다"는 말이 생겼을 만큼 혹독한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그들을 지휘 감독해야 했던

 한국과 대만인 감시원들 다수가 전후 전범으로 몰렸다.


◑ 일본은 피해자들의 요구나 사죄에 묵묵부답

일본은 피해자들에게 단 한 마디 사죄의 말도, 원호나 보상도 없이 피해자들의 요구를 묵살과 무시로 일관해 왔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민간인 청구권이 공식 소멸되자 피해자들은 마지막으로 사법부의 양심에 호소하는 길을 택해

 소송을 제기했으나, 최고재판소마저도 "보상해 주어야 마땅하지만 실정법이 없어 어쩔 수 없다"는 논지로 기각 및

 각하 판결을 내렸다. 그래도 피해자들은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정부측에 입법을 권고한 부언(付言) 판결을

 근거로 일본 정부와 정계에 입법 청원 운동을 계속하고 있지만 전망은 어둡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서문을 통해 "평생을 정신병원 격리 병동에 갇혀 있다가 외롭게 죽은 한 전범 출신자의 고별식

을 취재하면서 견딜 수 없는 분노로 몸이 떨렸다"고 적고 있다. 포로 감시원으로 3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7년, 정신병에 걸려 격리 병동에서 40년, 이렇게 꼭 50년을 이국땅에서 고통 속에 살다 간 그의 죽음을 일본 정부가

 숨기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죽은 사람에게 문상도 영결식도 허용하지 않은 조치를 그 증거로 제시한 지은이는

"한 인간의 일생을 그렇게 해 놓고도 양심의 가책은 커녕 미안한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고 토로하면서, 현대사의

결락을 보완하는 기분으로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우리가 왜 전범인가
끝나지 않은 전쟁 
어떤 죽음 
출소 후의 생활 
동진회 탄생 
인디안 비스킷 
사형수 감방 
세기의 유서 
반장된 죄 
광복, 그리고 전범 
손가락 재판 
  
뺨 한 대에 징역 10년
전범 재판 
콰이강의 노예들 
포로가 없는 군대 
포로 감시원이 되어 
죽음의 섬 
민간인 억류소 
고려독립청년당 
탈주의 종말 
  
버려진 백성들

인도네이시아 독립의 별 
전쟁은 끝났어도 
끝없는 투쟁은 시작되고 
가족의 슬픔 
일본 국가 배상 소송 
  
한국인 전범들의 절필 유고
 
참고 자료





1990년대 전반기 한국일보 주일 특파원 시절, 한국인 전범 출신자들의 법정 투쟁 취재였다. 광복 반세기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에 한국인 전범이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인 뉴스가 되었다.

식민지 출신 군속용인 신분인 포로 감시원 148명이 어떻게 전범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으며, 그 가운데 23명이

사형을 당했단 말인가! 일본의 A급 전범은 불과 7명만이 사형을 당했을 뿐이다. 더구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보상과 원호 요구가 거부되어 법정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정은 귀를 의심케 했다. 그들의 외로운

투쟁을 돕고 싶었다. 집필 결심을 굳혀 준 사건은 또 있었다. 40년을 정신병원 격리 병동에 갇혀 있던 전범

이영길옹의 죽음이었다. 그는 포로 감시원으로 3년, 감옥에서 7년, 정신병원에서 40년을 살았다.

남의 땅에서 그렇게 반 백년을 산 그의 죽음을 취재하면서, 견딜 수 없는 분노에 몸이 떨렸다.

일본 정부는 그의 죽음을 숨기려고 했다. 동료들에게 부음을 전한 것도 이틀이 지나서였고, 조문객 분향이나

영결식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가 살아있을 때에는 동료들의 병문안조차 막았다. 기막힌 그의 인생이 널리

알려지기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한 개인과 그 가족의 인생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도, 양심의 가책은커녕

미안한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전쟁터에서 발생한 모든 범법 행위를 전범이라고 규정한다고 해도, 그들의

행위가 전범 혐의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남의 뺨을 때린 행위가 범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전범

재판이라 해도 그것이 사형이나 무기징역 또는 10년, 20년 장기 징역형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강제노동,

영양실조, 의약품 부족 등으로 수많은 포로가 죽게 된 책임을 어떻게 말단 군속용인들에게 물을 수 있는가.

살인기계 또는 살인마라 불리던 일본 군부의 전쟁 미치광이들이 사면을 받은 일과 비교하면, 징용이나 징집을

피하기 위해 포로 감시원이 된 식민지 청년들의 전범 혐의라는 것은 감정적인 보복의 산물로 볼 수밖에 없다.

더욱 기막힌 일은 그들이 고국에서도 버림받은 일이다. 한국 정부는 그들의 문제에 아무 관심을 갖지 않았다.

무관심 정도가 아니라 백안시했다고 해야 옳다.

민간에서도 그들을 침략 전쟁 협력자로 몰아 온갖 차별과 박해를 가했다. 억울하게 죽고 감옥을 살고 명예까지

더럽혀진 그들은 천추에도 씻지 못할 한을 품은 채 하나 둘 죽어가고 있다. 보상보다 명예 회복이 급하다.

올해는 광복 60년, 한일협정 4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전쟁의 피해자인 식민지 청년들이 그렇게 억울한 일

을 당한 사실은 우리 역사에도 빠져 있다. 늦었지만 구천을 맴돌 원혼들을 달래고, 우리 현대사에 불행한 사실

하나를 추가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썼다.




● 저자 : 문창재

◑ 문창재
강원 정선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고, 1961년 서울에 올라와 양정고와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1982년에 일본 게이오 대학 신문연구소를 수료하였으며, 논설위원

재직 중 한양대학교 언론대학원을 졸업했다. 신문사에서는 동경특파원, 국제부장, 사회부장, 정치2부장, 편집국

국차장 등으로 일했고 논설위원실장을 끝으로 2004년 정년퇴직했다. 퇴직 후 내일신문 객원논설위원으로 일하다

 2009년 논설고문이 되었다. '동경특파원 보고서', '역사는 하늘보다 무섭다', '나는 전법이 아니다', '지구촌 한국

인'(공저) 등의 저서가 있으며, 전 육군참모총장 백선엽, 전 해군참모청장 함명수, 전 해병대사령관 공정식, 창군

간호장교 조귀례 등 군 원로들의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신문사 재직 중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감사, 관훈클럽

서기 등 언론단체 임원으로 봉사하였다.
현재 내일신문 논설위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심의위원으로 있다.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징발됐다가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으로부터 '전범'으로 몰려 교수형을 당하거나

징역형을 받았던 '재일 한국인 전범 출신자' 동진회(東進會) 회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

지은이는 일본 도쿄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면서 이들의 기구한 운명을 접한 뒤 취재를 거듭해 왔다.
"일본은 수십만 명의 연합군 포로가 붙잡히자 조선과 대만 청년들로 하여금 감시하게 했다. 종전 후 조선 청년

들은 보복성 재판을 연합군 측으로부터 받았다. 제대로 항변할 기회조차 없었다. 이들은 조국이 광복을 맞은

뒤에도 도쿄 스가모형무소에서 형을 살았다."
지은이는 이 조선 청년들이 자살하거나, 정신병원으로 가기도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일본 재판부는 이들에 대해 "배상해 줘야 마땅하지만 실정법이 없어 어쩔 수 없다"며 배상을 기각했다.

한국 정부도 이들의 주장에 제대로 귀를 귀울여본 적이 없다. 한국 정부는 1965년 일본에서 받은 청구권 자금을

나눠주는 데도 이들을 제외시켰다. 지은이는 이들을 '버려진 백성'이라고 표현했다.
- 동아일보(2005.04.30)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 때문에 한국인 148명이 전범으로 처벌 받았고 이 가운데 23명이 사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 책은 태평양 전쟁 재일 한국인 전범 출신자 모임인 동진회(同進會) 회원들이

50년이 넘도록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보상 투쟁을 다룬 논픽션이다.
90년대 도쿄 특파원 출신인 저자는 일본 근무 중 동진회의 법정 투쟁 취재 보도를 계기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들과 함께 하면서 소송 기록과 관련 자료들을 모았다.

이 책에는 유기징역형 복역자가 사형집행을 앞둔 동료에게 받아 보관해 온 옥중 절필 사본이 처음 공개돼

눈길을 끌고 있다. 교수형 또는 총살형으로 이국땅 옥중에서 짧은 생애를 마감한 사형수들은 모두가 억울한

심경을 토로하며 "이 세상에 조금만 더 살고 싶다"고 호소한다.
이들 기록과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연합국 전범 재판은 보복성이 강한 감정 재판이었다.
고발장ㆍ고소장과 증거도 무시된 재판에서부터 피해자의 손가락질 한번으로 기소되는 손가락 재판의 실태,

뺨 한대에 징역 10년이란 말로 상징되는 감정 재판의 실상이 수록됐다.
유기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 한국이 독립국이 된 뒤에도 일본 도쿄 스가모 형무소로 이감

되고 남은 형을 살아야 했다. 국적이 달라졌는데도 범죄를 저지를 당시 국적이 일본이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평생을 정신병원 격리 병동에 갇혀 있다가 외롭게 죽은 한 전범 출신자의 고별식을 취재

하면서 견딜 수 없는 분노로 몸이 떨렸다"고 적었다.
- 서울경제(2005.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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